2009/05/11 18:30
미술관옆 도서관
::: 포스트의 재구성 #14 :::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시작했으니 더 좋지.
자기 소설 속에서 치기를 보는 부끄러움은 면할 수 있잖아."_은희경, 작가의 말 中
요새 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잡식성으로 읽는다.
하지만 3년 전만 해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실용서, 자기계발서, 3류 소설이라 생각했던 책은
전염병처럼 피해다닐 정도로 아집이 있는 독서가였다.
지금은 소설과 인문서가 아닌 다른 분야의 책도 거부감 없이 양서로 구분할만큼 관대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도서관 구석에서 빌려읽었던 한국소설(제 2의 창작, 번역을 거치지 않은 진정한 한국어)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가지고 있다. 그 당시 이들처럼 쓰고 싶어서, 스프링 노트를 여러 권 사놓고 받아 적기를 반복하며 낮꿈을 꾸었다.
<작가의 말>은 곧 그들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언제나 나는 '무진'(김승옥이 언어 속에 가두어 둔 도시)을 여행하였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나혼자 깨끗하다 착각했던 그 시절, 만났던 작가이야기를 할까 한다.
내 책장을 가득 메운 외국문학들 속에서도 그 빛이 흐려지지 않는 그런 작가들이고
.... 커피자국과 낙서들이 가득한 그런 책들이다.
이제는 무진을 떠나온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이들처럼 쓰고 싶다.
그래서 읽는다.
치기를 보는 부끄러움도 없이...
1. 무진기행, 김승옥


첫 번째 책은,
이제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외치고 계신 김승옥의 소설전집 1권은 <무진기행>이다.
학부때는 60년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20대를 알아가기 위해서 읽었다.
현대작가론 시간, 그의 글은 때론 80, 90년대 작가들보다 젊었다.
60년대가 그를 키웠던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지언정 그는 60년대의 재산이고, 한국문학의 '빛'이다.
주인공은 새출발할 때마다 무진에 갔지만, 나는 실패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이 소설을 읽었다.
공허감이 들 때마다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싶었으나 마땅한 대상을 찾지 못해서 읽었다.
피가 나지 않아, 생살에 부러 상처를 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닌다는 것,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사무소에 출근했다가 퇴근한다는 이 모든 것이
실없는 장난'이라고 말하는 김승옥을 잊지만하면 읽어댔던 것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란 말을 할 때마다 그가 생각날 것 같다.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쓸쓸하다'란 말이 생각날 때마다 이 소설을 읽을 것이다.
국어의 어색함이 '사랑한다' 쓸쓸하다' '고독하다'란 말을 쓰고 싶은 충동을 쫓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당히 말하겠다. 내겐 김승옥이 있어, 한없이 쓸쓸하고 고독한 20대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1964)
2. 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나의 우울, 탈낭만화 성격의 80%는 은희경 탓이다. (참고 포스트: http://blog.naver.com/ddinne/3449602)
두번째 책, <타인에게 말걸기>는 학부 시절 전공책보다 많이 들고 다닌다며
동아리 선배들이 실제 타인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던 소설집이다.
표제작 '타인에게 말걸기'는 친절하지 않은 여자가 소통에 목숨거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소설 속 '나'처럼 지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유는 '무엇보다 인상을 남기기 싫어서이다' 늦으면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나와서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다. 이렇듯 그녀보다는 '나'에 가까운 '나'가 화자라서 더 이 소설을
내 일기처럼 자주 펼쳐보았다. '어쩐지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말이다.
지나치게 권태에 가득 찬 일상에서 은희경의 소설은 어떤 의미였을까.
추억을 더듬으며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참 어리석게도 차가웠구나...란 생각이 맴돈다.
사실, 거절당할까봐 겁이 나서 피했던 관계들을 정리해버린 결과, 은희경에 대한 집착과 환상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타인의 무조건적인 틈입은 결코 바라지 않는 바지만, 이제 타인을 일적인 사람, 일외적인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을만큼의
분별력도 생겼다. 중요한 관계들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는 충분히 타인에게 말걸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은희경의 단편은 살면서 한번쯤 마주치게 될 관계의 조각들을 잘도 요리해서 보기좋고, 먹기좋게 담아둔
최고의 전채음식 hors-d'oeuvre 이다. 그녀가 그려낸 단조로움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최상의 생활이기 때문이다.(1996)
3. 하나코는 없다, 최윤
세번째 소설은,
1994년도 제 18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은희경 소설과 '관계의 건조함'이란 면에서 연결된다.
제목 <하나코는 없다>에서 하나코는 누구일까. 처음 이 소설의 제목을 읽었을 때는 일본 여자이겠거니 했지만
여주인공의 별명이자 '그들만의 암호'였다. 한 여자를 지칭하기 위한 그들(남성) 사이의 문이자 벽인 존재.
작품성이 높기로 유명한 이상문학상이지만 특히 최윤의 이 작품은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읽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리뷰하나 남기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특히 겨울 안개에 조심하라...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심사평대로 관념적인 소설이다.
그녀는 코가 아주 예쁜, 어떤 동창 모임의 일원이었다. '박물관에나 넣어 둘 만한 진지함'을 가졌던 하나코.
그녀처럼 늘 없는 듯 있는 존재이고 싶어서 이 소설을 사랑했다. 난... 그리고 많은 편지를 썼다.
남녀간의 우정이란 결국 성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친밀감의 갭(gap)_목적론적, 결과론적 관점_
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욱...더.... 없는 하나코를 찾아 헤매다녔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연극은 계속된다. (1994)
4. 유년의 뜰, 오정희
난 조금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위에 하나코처럼 있는 듯 없는 사람이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내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탓, 세상탓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시작한 글쓰기는 이제 '업'이 되었다. 그리고 오정희식 문장은 여전히 박완서만큼이나 내게 큰 테제이다.
진짜 좋아하는 건 숨겨두는 내 습성탓에 이제야 그녀의 소설을 짧게 리뷰한다.
오정희의 작품집 중 '중국인 거리'와 '유년의 뜰'이 실린 이 소설집을 가장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저녁의 게임'이라는 단편을 필사했었다. (그러고보니 이 작품도 1979년도 제3회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작이다)
화투를 하고 있는 아버지와 딸.
그 지리한 대화를 읽고 있자니, 답답함이 몰려온다. 왜 난 이 게임을 즐겨 읽는 것일까.
첫째, 문장이 길어서 안심이 된다.
둘째, 그래서 한 문장을 여러번 읽는다.
셋째, 절대 영어번역으로 못 살릴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 뿌듯하다.
만물이 잠들기를 기다려 벌거벗고 5연발의 총알이 장전된 총을 귀 밑에 들이대는 것은 단순히 절대적 긴박감과 자유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유가 아니라 유희일 것이다.(1976) 자유가 아닌 유희로서 그녀의 소설은 내게 총같은 무기이다.
에필로그 ego2sm |
"잠이 안 오는 밤,
나는 자주 생을 바쳐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이들을 생각하고 글에 대해 성실함이 생에 대한 그것이며
진실로 소중히 아끼는 것들을 사랑하고 지키는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목소리는 낮추고 사랑과 분노와 슬픔은 깊이 가라앉혀 보다 큰 힘으로 키울 일이다.
이슬이 보이지 않는 사이 굳은 땅속으로 스미어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듯." _오정희, 작가 후기 中
이들은 나에게 안개이자, 이슬이었다.
담배와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반항스럽게 세상에 마음껏 침을 뱉게 해주었다.
있는 듯 사라지는... 그리곤 그리울 때마다 보이는... 어둠 속에서도 존재하는 모어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였다.
나는 평생 문학도를 꿈꾸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